미래의 세포조직 & 미래를 위한 신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관리자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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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미하이 칙센드미하이의 『몰입의 재발견』의 글을 풀뿌리 민주주의 활동을 하는 이들을 위해 발췌한 것이다. 이것은 비폭력평화실천가들이 어떻게 최고의 수행능력을 가진 개인이면서 그것을 지원하는 학습조직(learning orgnization)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자라면 플로우와 복합성 그리고 밈을 통한 진화와 영생 -육체는 죽어도 정신은 살아있는 유기체로 작동하기-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을 제공한다.)

 

 

 

미래의 세포조직

 

어떤 일을 달성하기에 이상적인 사회 단위는 집중적으로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집단,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각각이 스스로 가장 잘 아는 일을 하면서 공통의 목표에 기여할 수 있는 집단이다. 이러한 유형의 ‘세포조직’은 복합적인 사회단위이면서 동시에 구성원에게 플로우를 최대한으로 제공하는 집단이다. 오늘날 그러한 집단의 일원이 될 기회는 많지 않다. 우리가 참여하는 단체는 거대하고 비자발적이며 익명으로 활동할 공산이 크다. 오늘날 그러한 집단의 일원이 될 기회는 많지 않다. 일하는 회사에, 지지하는 정당에, 혹은 살고 있는 공동체에 자기만의 방법으로 기여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우리가 진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기에 적합한 세포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상상해보자.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사회시스템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회조직이 존속하려면 반드시 4가지 주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조직 구성원이 생계를 유지하도록 주변 환경에서 자원을 얻어야 한다. 사냥 집단은 사냥감을 찾아야 하고, 대학은 학생을, 은행은 예금을 찾아야 한다. 둘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집단과 조화롭게 활동해야 한다. 셋째, 집단 내의 자원과 임무를 분배하는 한편 구성원 사이에 조화와 협력을 유지해야 한다. 넷째, 조직 전체에 희망과 정체성과 목적을 부여해줄 가치관과 신념을 만들어내고 유지해야 한다. 이 4가지 기능은 대게 서로 다른 개인이나 조직 내부의 하위 조직이 수행한다.


이 전제가 옳다면, 가장 작고 실제적인 지화 세포조직은 적어도 4명으로 구성될 것이다. 당신이 이웃에 사는 세 사람과 그러한 ‘진화적 세포조직’을 만들기로 했다고 가정하자. 이 집단의 초기 목적은 환경을 최대한 잘 이해하여 복합성으로 이끄는 힘은 무엇이고 반대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은 무엇인지 현명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 사람(규모가 크다면 한 사람 이상이어도 좋다)은 세포조직이 있는 공동체나 동네의 경제 조건에 관해 정보를 모은다. 제조 자원, 서비스 자원, 금융자원은 어떠한가? 은행의 투자정책은 어떠한가? 부동산 소유주나 부동산 개발자들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소기업이나 노동자의 장래는 어떠한가? 경제 전문가가 조사하여 체계적으로 요약한 내용은 나머지 구성원들과 만날 때 공유할 수 있다.


두 번째 사람은 공동체의 정치 네트워크에 관해 정보를 수집한다. 주요 인물이나 집단은 누구고, 어디에서 힘을 얻는가? 누구의 이권이 대변되고, 누구의 이권이 대변되지 않는가? 선출된 대표들 사이의 주요 갈등은 무엇이고, 공동체 내에서 잠재적으로 조직될 준비가 되어 있는 정치 세력은 어디인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이렇게 모은 정보는 규칙적으로 다른 구성원들과 공유한다.


세포조직에서 세 번째 자리를 담당한 이는 내부 조직을 책임진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각 구성원의 기술을 그리고 세포조직의 내부 기능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회의가 열리게 하고, 정보가 잘 순환되게 하고, 구성원들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또 실제로 그대로 시행하게 하며, 행동이 필요할 때 행동하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이 역할에는 조율 리더십, 곧 세포조직이 실제로 잘 돌아가게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구성원은 정보를 통합하고 의미있는 형태로 만든다. 이 사람의 임무는 복합성의 기준을 명확하게 유지하고, 그것을 세포조직이 처한 특정 상화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의견으로 조직은 전체로서 공동체의 엔트로피를 평가하고, 엔트로피 대신 조화가 많아지도록 할 방법을 찾는다.

 

언뜻 보기에는 이러한 단체가 기존의 정치 집단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듯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대단한 차이가 있다. 정당은 자기 구성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으로, 사회 전체에 끼칠 영향과는 무관하게 조직된다. 반면 진화적 세포조직의 목적은 정보를 수집하고, 특정 상황의 현실을 최대한 이해한 뒤에, 진화라는 대의를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 역시 이기적인 목표지만 각각의 이익이 인류뿐 아니라 생명 전체의 이익과도 통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적 세포조직은 실제로 무엇을 ‘해야’하는가? 첫째이자 여러 면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단지 구성원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중에게 정확하고 관련서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다. 우리는 대개 자신이 사는 공동체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전문적인 지식에만 편중되어서 공동체 내부의 복잡하게 얽힌 연결고리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도시 구획이나 공공 계약이나 세금 같은 문제들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른다. 그런 문제에 관해 알려야 할 언론은 대개 광고 판매에만 혈안이 되어서 각각이 속한 지역의 복잡한 움직임을 주의하여 살피는 데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 대다수 독자가 투자가들의 재정적 움직임보다 연예인의 성생활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언론은 그에 충실하게 따를 것이다. 무의미한 소음이 되어버린 뉴스들 틈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자료를 걸러내려고 애쓰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세포조직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제일 가까운 곳, 사실 정보에 접근하기도 쉽고 왜곡되어 있을 확률도 낮은 곳에서부터 정보를 입수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해야 할 활동은 그렇게 수집한 사실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접하는 뉴스의 가장 큰 문제는 뉴스가 대부분 단편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각각의 뉴스가 독립적이어서 원인과 상관관계가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신문 사설을 동네에서 조직폭력이 늘고 있다며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원인이 되는 정치적, 겅제적 결정은 언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언론은 필연적으로 쉽게 잊어버리고 집중 시간도 짧다. 피상저인 사실 이면에 깔린 영향력을 이해하려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진화적 세포조직의 주요 장점은 사실을 평가하기 위한 원칙이 있고 원칙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를테면 구획 재설정, 특정 경계지역 지정(특정 지역에 은행, 보험, 심지어 슈퍼마켓까지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일-옮긴이), 폐교, 골프장 건설 등의 문제가 단기적인 사익을 기준으로 평가되는 일도 없을 테고 자유시장이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차용된 낡은 신조를 기준으로 평가되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다음을 의문시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동체의 복합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복합성의 원리는 안정적이고 불변한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의 문제에 적용하는 방법은 해가 갈수록,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축적될수록 변화하여 더 복합적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세포조직은 그 운영 방법에서 진화의 원리를 표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이해하고 난 뒤에 세포조직은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그렇게 도달한 결론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다. 마야의 베일을 한 구석의 일부나마 제거한 것은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 각 구성원의 삶(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참여 의식, 역사의 복잡한 테피스티리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깊이)도 풍요로워지고 건가해질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식 추구는 현재 우리가 자유시간을 써버리는 오락거리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플로우의 원천이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몇몇 사람이 주변의 실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투나잇쇼(미국 NBC의 대표적 심야 토크쇼-옮긴이」를 보는 일이나 음악을 들으면서 코카인을 흡입하는 일보다 한층 기분 좋은 일이다.


조직 내의 개개인이 자신의 속한 곳의 여건을 어느 정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지식을 행동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처음에는 특정 지역 대표를 지지하면서 현존하는 정치단체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진화적 세포조직이 공동체내의 다른 세포조직이나 이웃 공동체의 조직과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이 시점이 되면 새로운 정치 활동도 가능해진다. 축적한 정보를 더 널리 전파하기 시작할 수도 있고, 결정 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단체를 설립할 수도 있다. 결국 분리된 세포조직들은 느슨한 연합 형태로 협동하면서, 사회 전체에 비전 의식을 일깨울 수 있는 진화적 동맹이 된다.



 


미래를 위한 신념

 

그러한 동맹을 기반이 될 기본 신조는 아주 간단할 수도 있다. 미래를 복합적인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진화의 논리에서 제시하는 다음 공리를 따라야 한다.

 

첫째,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일부다. 공기, 땅, 바다, 과거와 미래 모두, 이 중 어느 것에든 무질서를 야기하면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


둘째, 자신이 독특하다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이 있는 현 지점에서 유일한 의식의 주체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있다. 자신의 마음과 욕망, 행동을 통제하게 되면 주의를 조화롭게 할 확률이 높다. 이러한 것들이 유전자와 밈의 통제를 따라가게 방치해두면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할 기회를 잃고 만다.


넷째, 현재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 자아는 창조적인 구성물이다. 누구도 완벽해지거나 완성되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요소는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하는가 하는 점이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진화로 가는 길이다.

 

이 목록은 더 길어질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완벽해지거나, 십계명처럼 돌에 새겨 넣을 수도 없다. 진화 과정을 관찰하여 얻은 대안은 그 정의상 우리의 지식이 확장되며 변할 수밖에 없다. 찾아야 할 끝도 궁극의 지혜도 없다. 그저 시간에 따라 점점 풍요롭고 복합성이 향상되는, 천천히 깨어나는 의식만 있을 뿐.


이러한 제안을 따른다고 해서 만화가들이 상상해낸 중세의 모습 덕분에 우리에게 익숙해진 그런 식의 영생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죽음은 끝이다. 신체의 물리적 구조가 분해되면 수십 년 동안 뇌세포의 그물망에서 빛나던 의식도 사라진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진화가 더 복합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정신 에너지를 투자하는 만큼, 육체가 죽은 후에도 우리가 기여한 바는 계속 자라난다. 한때 우리의 일부였던 유전자와 밈에 담겨 있는 정보는 그후에도 미래를 형성해나갈 것이다. 우리 행동의 메아리가 시간의 복도 끝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과 의식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전략이 지금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물로 이 의문에 정답은 없다. 어쩌면 미래의 어떤 존재 차원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개성이 정말로 보존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존재의 복사본이 사후에도 어떤 영원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적인 구름에 앉은 채 생존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주장하듯 의식이 더 진보한 물리적 실재로 거듭나게 될 수도 있으리라.


이렇듯 마음이 놓이는 개념을 받아들이려면 현재의 지식체계를 훌쩍 초월하는 신념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기꺼이 그렇게 뛰어넘을지 모르나, 어떤 이는 망설이면서 불신을 접어두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단한 도약도 필요없고 따라서 우리가 아는 현시로가 타협하지 않고도 신념을 얻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생명의 복합성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우리 각자가 맡은 역할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우리가 자신의 자아와 지나치게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목적을 무시한 채 개인적인 목표에 정신에너지를 많이 투입할수록, 즉 통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분화에만 집중할수록 개성이 해체된다는 상상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것이다. 반면 진화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만큼, 복합성을 증진시키는 과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만큼 죽음의 위협은 약해진다.


진화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복합성이 영원히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과, 유전자와 밈이 그런 발전과정을 계속 이끌어나가리라는 믿음에 안주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후퇴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인간 뇌조직을 먹고 사는 신종 바이러스가 언제든지 생겨날지 모르고, 100년 후에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쓰레기에 익사할지도 모른다. 뇌가 복합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더 높은 분화와 통합의 차원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어쩌면 삶이라는 모험도 우주의 세월이라는 막대한 시간에서 보면 단지 순간의 일탈에 불과하다고 증명될지 모르고, 우리는 퇴화하여 유인원과 바퀴벌레를 거쳐 생명 없는 먼지로 돌아갈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이 매우 현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진화를 믿는 마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확실히 알았다면 신념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미지의 영역이 너무나 방대하고 위험하다는 그 이유로, 길을 선택하고 용기를 얻게 해줄 모종의 신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의미 있고 지속적인 설계과정의 일부라고 믿지 못한다면,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결의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진화를 믿으려면, 이미 예정된 결과를 믿을 필요는 없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믿으려는 태도는 필요하다.


바로 그러한 신념의 도움으로, 진화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일도 하나의 일어날 법한 가능성이 된다. 무엇보다 이 과정은 현실을 또렷이 보지 못하게 가로막은 여러 층의 환상을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유전명령, 습관, 문화적 조건부여 같은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알코올중독자가 먼저 자신이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우리도 먼저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보편적 이치와 조화를 이루는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복합성의 진화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할 때, 자신과 다른 생명체들 사이의 유대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는 제약하는 자아의 필요에서, 무의미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공포에서 더 쉽게 자유로워진다.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나 삶이 고요하고 즐겁게 되는 것은 바로 이기적인 쾌락과 사적인 성공이 삶의 중심 목표가 아닐 때다. 자아는 초월적인 목적에 자신을 잃어버릴 때, 그것이 위대한 시를 쓰는 일이든 아름다운 가구를 만드는 일이든 은하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일이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든 간에 일상적인 존재로서 겪는 두려운 일이나 실패에 상당한 내성을 얻게 된다. 그러면 의미가 있게 되고, 질서와 복합성을 증진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한참 뒤에도 심지어 우리가 잊히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목표에 정신 에너지를 집중하게 된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우리가 다른 생명 전체에 대항해 외로이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앎은 취할 듯한 안도감을 준다. 기분 좋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면서,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한편 고요한 마음으로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실 우리의 목표가 우주의 모자이크라는 장대한 구조물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해야 할 까닭이 있겠는가? 자신의 뜻대로 된다면 그보다 나은 일도 없다. 그러나 개인의 궁극적 목표가 우주의 목표와 하나가 된다면 결과가 어떻든 패배가 아니다. 럭비처럼 흥분되는 게임을 하거나 아름다운 곡조를 부르거나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데 흠뻑 빠지거나 할 때만 플로우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플로우가 하루하루 삶의 일반적인 경험이 되어 모든 일에 스며든다.


온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해내는 행동 하나하나가 더 나은 미래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늘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바로 거기서 멈춰도 좋으리라. 복합성의 진화가 보장될 터이므로. 그러나 홀로 행동하는 사람이, 늘 변하고 움직이게 마련인 목표를 추구하면서 흔들리지 않기란 대단히 어렵다. 바로 그런 까닭에 진화의 방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목표를 공유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단계로 실현하도록 도와줄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미래 동맹은 그 한 가지 방안이다. 진화적 세포조직들은 개개인이 현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타인의 정신 에너지를 착취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짜놓은 미망과 환상의 베일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정보를 교류하면서, 미래에 유용한 밈과 반대로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밈을 구별하는 힘도 강해질 것이다.


진화적 세포조직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야심 찬 목표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플로우를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목표란 전체적인 조화속에 각각의 목소리가 녹아들게 하고,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의 의식에 자기의 독특한 의식을 더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정신 에너지의 중심을 복합성과 질서가 증진되는 쪽으로 흐르는 물결에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새로운 암흑시대의 징후가 폭증한다 하더라도, 혼돈과 무감각이 증가하고 있다고 해도 미래에 운명을 건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진화는 천년왕국설처럼 다음 해나 다음 세기나 다음 천년에 재림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이는 문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시간이 자기 것이 된다. 온갖 비탄과 환멸이 있는 각각의 인생도 장구한 우주의 모험 앞에서는 순간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행동은 지구에서 그리고 아마도 다른 별에서 펼쳐지게 될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방향 잃은 혜성과 불운하게 충돌하는 일이나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왕성하게 증식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며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러한 책임을 방기하면 미래는 냉담한 우연에, 더 심하면 다양한 가면을 쓰고 있는 기생 착취자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진화하는 질서의 패턴에 가담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특정 문화에서 정의하는 피상적 ‘행복’조차 누리기는 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사에서 가장 충실하고 즐거운 삶을 영위하면서, 잘 살았다고 확실할 수는 있으리라.

 


<용어 해설: 밈, 복합성, 플로우>

 

밈(meme): 이는 리처드 도킨스가 사용한 용어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생각이나 사상이나 관념이든, 물건이든, 시스템이든, 인간이 어떤 의도로 만들어낸 것은 모두 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밈도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진화하고, 일단 존재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유전자가 서로 경쟁하듯이 밈도 서로 경쟁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한다. 밈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인간이라는 매개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합성: 분화와 통합의 함수이다. 인간의 예를 들어 쉽게 말하면 분화란 ‘개성’ 혹은 ‘자기만의 능력’이다. 통합이란 ‘여러 능력의 조화’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다. 예컨대 주변 세상과 고립된 천재는 분화는 뛰어나지만 통합은 약하다. 따라서 복합성도 높지 않다. 진화의 방향은 ‘복합성이 증진되는 쪽’으로 이끌어 가야한다. 그럴 때 개인도 발전하고 사회도 나아지며 세상 전체도 더불어 살만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플로우(몰입):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하여 마치 시간을 잊은 듯한 느낌을 말한다. 가장 즐거운 일을 경험할 때 ‘흐르는 듯’하다는 비유처럼, 흘러가는 강물에 배를 띄워놓고 거기 앉아 둥실 떠내려가듯, 일이 저절로 되는 느낌 -‘물살에 휩쓸려가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 어마어마한 파도의 물마루에 올라타거나,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칠 때, 우리는 조화롭게 흐르는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 일에 몰두하고 일상생활의 걱정과 지루함을 초월하게 된다. 집중, 몰두, 깊은 연대감, 기쁨, 성치감의 느낌이 ‘플로우 경험’이다.

 

이것의 첫 번째 징후는 명확하게 규정된 목표에 주의가 집중된다. 우리는 자신이 몰두하고 집중하며 열중한다고 느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잘하는지 아닌지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태에 이르면 마치 자아의 경계가 확장된 듯 느껴진다. 항해사는 배와 바람과 바다와 하나가 된 것처럼 느끼고, 가수는 신비로운 우주의 조화를 느낀다. 이것은 행복의 조건과 가장 가까운 상태에 있게 되는 외적인 조건을 준다: ⓵ 거기에 구체적인 목표와 지키기 어렵지 않은 규칙이 있고 ⓶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고 ⓷ 자신이 제대로 하는지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 있고 ⓸ 주의력을 흩어지게 하는 일을 차단하고 활동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 음악, 연주, 공연, 종교의식은 이러한 ‘플로우 활동’의 좋은 사례다.

 

플로우 상태에 들어가는 두 번째 조건은 개인의 내적인 부분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술과 주변의 기회를 연결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다. 이들은 할 일이 전혀 없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도전할만한 목표를 설정한다. 플로우 상태에 들어가면 완벽하게 몰두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일시적인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판에 박힌 일상의 혼돈에서 피신할 수 있다. 더 복합적인 차원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도전에 부딪히며 잠재력을 끌어올린다. 여기서 활동은 ‘자기목적’적으로 그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 된다.

 

플로우의 경험의 특징

- 명확한 목표, 즉 목적이 뚜렷이 정의된다. 즉각적인 의견(피드백) 즉 자시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다.

- 단호하게 행동할 기회가 많고, 그렇게 할 기회와 자신의 능력이 맞아 떨어진다. 다시 말해, 도전해야 할 일에 필요한 능력과 그것에 도전하려는 개인의 기술이 잘 맞는다.

- 행동과 자각이 하나로 융홥되어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된다.

- 현재 하는 일에 집중한다. 하는 일과 무관한 자극들이 의식에서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이 일시적으로 없어진다.

-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자의식 상실, 자아 경계 초월, 성장하는 느낌, 더 큰 존재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이 든다.

- 시간관념이 바뀌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 경험 자체가 목적이 된다.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그 자체로 몰두할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행위와 의식이 통합하는 플로우는 복합성을 이끌어내는 훌륭한 수단이다. 플로우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이전과는 달라진다. 역설적이게도 플로우에 깊이 빠지면 자아를 잊어버리지만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자아가 성장해 있다. 이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즐겁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방향만 아니라 파괴적인 일에서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복합성이 증진되는 일에서 플로우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플로우의 관점에서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삶 속에서 순간순간의 기쁨과 깊은 만족을 끌어내는 법을 터특한 사람이었다. 부나 명예를 얻는 것에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자체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도전을 극복하는 데서, 조화로운 복합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진화 과정의 일부가 되는 데서.”

 

위의 경험이 증진되는 ‘초월적 자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5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삶을 즐겨야 한다. 이는 생산적인 ‘플로우’ 경험으로 달성할 수 있다.

둘째, 복합성을 더해야 한다. 자신을 개발하는 것과 주변과 나누는 것 이 두바퀴가 동시에 굴러가야 한다.

셋째,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 ‘내부의 장막’과 ‘외부의 위협’에서 비롯되는 왜곡과 망상에서 벗어나려면 꿰뚫어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기를 수양해야 한다.

넷째, 다지 현재 필요한 일에만 시간과 능력을 투자해서는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없으므로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다섯째,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조화로운 미래 건설’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라야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이 한 일들이 살아남아 미래와 함께하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죽음의 두려움도 극복하게 된다.

 

일과 삶이 하나로 흐르면서 행위가 ‘자기 목적적’으로 최적의 내적 조화를 갖게 되면 이런 플로우의 상태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펼쳐 보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즐기게 된다. 여기서 창의성, 절정의 성과, 재능개발, 생산성, 자긍심, 스트레스 감소, 심리치료의 임상적용과 같은 것들이 발생한다. 조화로운 의식, 내면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자아가 개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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