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갈등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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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상황에서 대화의 두 동기

관리자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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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 상황에서 대화의 두 동기<

 

‘눈에는 눈’이라는

오랜 속담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심오한 법칙이 있다.

우리를 전체성으로 인도하는 이 법칙은

“존재의 진실에는 존재의 진실”이다.

- 마크 네포 -

 


우리의 삶에서 공평함과 정의로움은 중요한 관심사이자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에 있어 중심 에너지이다. 특히 우리 각자가 느끼는 불만, 갈등, 분노, 폭력의 핵심에는 공평함과 정의로움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식에서 일어난다. 자극(stimulus)으로 인식되는 불공평하거나 불의한 상황, 사람, 관계 혹은 과제/일에 대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반응(reaction)은 불가피하게 일어나 자극에 대응하게 된다.


그런데 갈등전환 실천가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자극과 반응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인식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는 전혀 다른 실재의 결과로 인도되어진다는 점에서 그 작동 시스템에 대한 깊은 주의가 필요해진다. 한 사건이 그러한 현상으로 보이는 것은 그에 대한 인식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인식 시스템은 실제로 ‘봄(seeing)’의 과정에 참여하면서도 자신은 전혀 관여치 않은 것처럼 숨어있어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사물을 렌즈를 끼고 보면 사물이 그대로 내게 인식되는 것으로 보이듯이 렌즈를 통해 본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이다. 그 렌즈가 인식 시스템이자 인식 패러다임으로 존재할 때 대부분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식의 오류’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기가 몹시 힘들게 된다.

 

첫 번째 인식-반응 시스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상대방이 나에게 준 상처가 눈이나 이의 상실이라면 그에 대한 보복의 정당성은 정당한 것으로 생각되고, 따라서 언뜻 보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오래된 관습법(예, 구약의 시민법)은 주의깊은 성찰과 배려로부터 나온 것이다. 만일에 누군가 나를 때려서 내 눈에 상처를 내거나, 내 이빨을 부러뜨리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의 정상적인 반응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끝나지 않고 전신을 때려눕히거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눈에는 눈만큼, 이에는 이만큼이 아닌 그 이상의 보복 감정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의 상처에는 눈의 상처만큼, 이의 손상에는 이의 손상만큼의 보복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것에는 당사자 개인들의 안전과 공동체 유지라는 목표 달성의 원래 취지가 살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 원칙에는 우리의 불만, 갈등, 폭력의 자극에 대한 인식 시스템과 반응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요구되어진다. 만일 당신이 자유롭고 생명어린 풍성한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인식 시스템과 반응 시스템은 사실상 당신을 얽어매는 ‘덫’이 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정당성의 이름으로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되어진다.


지금부터 진술하는 것은 대부분이 충분히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의 삶의 에너지는 기쁨에 대한 추구만큼이나 공평함과 정의로움에 대한 기대와 그 충족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나는 앞서 진술하였다. 그런데 불공평함과 불의함에 대한 에너지로 전환될 때는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어진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하나 들고자 한다. 내가 자동차 운전을 하며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마을로 가는 길을 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런데 그 길의 좌우는 비탈이어서 운전자인 나는 공평함과 정의로움의 마을에 대한 자각과 그것에 온통 집중하며 운전을 하며 가고 있다. 공평함과 정의로움의 마을에 집중하며 갈 때는 자동차가 제 길을 잘 가고 있고 내 운전에 통제 가능하며, 그 운전이 편안한 것을 느낀다.


그런데 뭔가 불공평하거나 불의한 것이 인식되는 순간에 아뿔싸! 나는 어느 틈에 길을 벗어나 비탈의 내리막길로 내 차가 널뛰기로 곤두박질치며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미 운전에 대한 통제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내 자동차는 길을 벗어나 비탈 아래에 쳐박히고, 자동차도 손상이 가서 움직이기가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단지 차이는 불공평함과 불의한 것에 대한 인식이었는 데 – 그리고 그 인식은 정당하였다 – 자동차는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느 새 길을 벗어나 비탈로 내리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당신의 정당성이 당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에는 가게 하지 못하게 한다’라고 때때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가장 많이 항의와 저항의 질문을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당신의 선한 의도가 아이러니하게도 기대한 결과를 꼭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갈등상황에서는 전적으로 그렇다.” 라고 다시금 자기 일상의 사례를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여기서 인식과 반응의 시스템을 잠시 살펴보자. 무언가가 잘못됨, 기대 못 미침,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 일어남이라는 것이 자극으로 인식되는 순간에 (그래서 원래는 공평함과 정의로움의 에너지였는데 실제 인식은 불공평함과 불의함에 주목하게 될 때) 그 인식은 당신 내부에 불만, 화, 폭력의 표현에 대한 정당성을 작동시키고(그런 방식으로 반응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상처, 분리, 목표상실로 나타나게 된다(그리고 이는 그대가 원래 원한 것은 아니었다.) 원치 않은 결과를 목도할 때, 자각하지 못한 채로 나는 나의 선한 의도와 정당성으로 인해 그 결과에 대한 상대방에게로 비난과 책임전가가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된다(당신은 자신의 선한 의도와 정당성으로 그런 비극적 결과에 대한 자연스러운 유체이탈[내가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렇게 한 것이야]을 하게 된다).


당신이 그 무언가를 – 사람, 관계, 상황, 사건, 그리고 심리적 도전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극으로써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것이 정당하던 간에- 반응을 불만어린 감정으로 우울, 짜증, 분노로 표현하면 그것은 당신의 기대와는 달리 비극적 결과의 ‘자기-충족의 예언’이 작동된다.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정당하지만 그 결과는 당신이 기대하지 않은 실재(reality)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인식-반응 시스템을 당신 내면에 장착하는 한 나는 장담할 수 있는 데, 당신의 미래는 언제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에 반복적으로 도달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학교폭력관련 대응조치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강도의 세기에 대한 변형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째서 분란과 재심청구가 끊이지를 않는지 최소한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학폭법의 선한 의도는 실제로 가져오는 결과와 논리적 일관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진지한 학폭법의 적용은 대부분 당사자의 불만족이나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인식-반응 시스템: ‘존재의 진실에는 존재의 진실로’

 

이것은 언뜻 일반적으로 편한 상황에서 생각하면 타당하고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러나 갈등 상황일 때는 무척이나 작동시키기 어렵다. 이미 진술한 대로 정당성의 렌즈가 끼인 상태로서는 존재의 진실에 주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선한 의도와 기대한 결과의 일관성을 얻어내는 데 유일하게 효험있는 방식이기도 하다(물론 정치적으로 풀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의 영혼이 기쁨을 느끼는 방식으로는 이것이 유일하게 효험있는 방식이다).


존재의 진실에는 –인식하기- 존재의 진실로 –반응하기- 라는 말에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잘못, 기대에 못 미침, 갈등, 폭력에 관련된 사람, 관계, 상황, 사건이 자극으로 인식되는 순간에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그 자극이 ‘존재의 진실’에 대해 그동안 그와 내가 그리고 소속 공동체가 뭔가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존재의 진실’을 탐구하고 그것을 배우는 기회로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모든 비난과 불평의 말과 행동의 표현은 불의함과 불공평함의 마스크(가면)로 나타나지만, 실제의 진면목은 ‘존재의 진실’에 대한 가장(假裝)으로 인식한다. 정당성과 옳고 그름의 렌즈는 학습의 결과로-학습으로 인한 무의식적인 선택 결과로- 착용한 인식 시스템이었던 것처럼 존재의 진실에 대한 인식의 렌즈도 나의 선택으로 주어진다. 

 

존재의 진실로 반응하기는 ‘아님’의 에너지보다 당신 내면과 그 상황에 ‘진정한 것’(what-is-real/true)에 주목을 하면서 대응하는 언어, 행동,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존재의 진실에 초점을 두고,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존재의 진실로 대하게 되면, 인식-반응에 있어 일관성이 있게 되면서, 교감의 연결로 인해 이해의 빛과 열정의 에너지가 발생하면서 이해와 변화의 배움과 성장이 출현하게 된다. 이는 근본적인 무지를 작동시키는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크 네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눈에는 눈’이라는

오랜 속담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심오한 법칙이 있다.

우리를 전체성으로 인도하는 이 법칙은

“존재의 진실에는 존재의 진실”이다.

완전한 집중의 목적은

내밀한 내맡김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생명체 속에 깃든 생명력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존재의 진실에는 존재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마크 네포가 제기하였듯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넘어 ‘존재의 진실에는 존재의 진실’에로 우리의 인식-반응 시스템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진술한 것 이상의 의미가 더 있다.

 

첫째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생명체 속에 깃든 생명력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무력하기 때문이다. 정당한 것을 주장하는 데는 에너지 소모와 스트레스 그리고 그로 인한 지침, 곧 생명력의 상실이 가속화된다. 서클속에서 대화가 일반적인 논쟁-정당성의 주장-과 달리 각자의 생명력이 더욱 생생하게 채워지는 방식을 제공하는 이유는 정당성보다는 ‘존재의 진실’에 대한 말하기와 경청하기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체성으로 인도하는’ 길을 여는 데 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자신의 관점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상대에게 다가가며, 상대의 관점보다는 내 관점에 대한 호소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관점에서 길을 잃게 되기 쉽고, 제 3의 권위자에 의지하는 경향성을 낳게 된다. ‘눈에는 눈’은 나의 관점과 입장의 고수에서 참아낼 수 있을 만큼의 상대방에 대한 마지못한 수용에 머문다. 그러나 존재의 진실은 실제로 나와 너를 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나와 너를 넘어선 전체성의 공간이 주어지면서 나와 너를 동시에 변화시킨다. 존재의 진실은 상호성을 넘어선 전체성이 각자의 관점과 입장을 수정시키면서 자기를 열어 더 큰 선에로의 가능성을 연다.

 

셋째는 ‘존재의 진실’ 이 가져다주는 치유와 회복의 창조이다. 우리에게는 정의로움과 공평함만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이 삶의 에너지이자 지성의 작동 원리로도 작동한다. 실제의 삶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않든 공정하지 않은 것들로도 가득하다. 불의의 교통사고, 재난, 운명의 장난은 수없이 우리의 삶의 영역에 침범해 들어온다. 그럴 때 우리는 정의로움과 공평함에 대한 간절한 감각을 키우기도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불의와 불공평함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함에로의 에너지이다- 또한 우리의 삶을 승화시키는 자비와 연민에 대한 감각도 배우게 된다. 타자의 고통어린 순간에 직면하는 것은 그러난 자비와 연민의 원천을 열게 하고, 이를 통해 치유와 회복, 온전함에로의 헌신을 강화시킨다.

 

단순히 선택하는 의지의 문제에서 이제는 전체성이 나를 통해 흐르도록 ‘내밀한 내맡김’을 배우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선물이다. 의지의 선택을 넘어 ‘내밀한 내맡김’이 일어나는 공간이 있게 되면서부터 나는 좀더 자유로워지고, 좀더 쉬워지고, 좀더 풍성해지는 것을 발견한다. 갈등이 그러한 존재의 진실에 대한 인식-반응의 문으로 작동하면서 이제 나는 ‘적대자’가 ‘인도자’로 ‘무거운 짐’이 ‘선물’로 작동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실제로 준비되지 않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인해 ‘존재의 진실’에 다가가는 주목하기만으로도 새로운 그 무엇의 변형과 창조가 일어남을 내 주변에서 보게 된다.

 

‘존재의 진실에는 존재의 진실로’!

그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도

그러한 신실함으로 내가 구원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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