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갈등 전환

진행자 훈련 자료 대화 & 갈등 전환

진정성있고 의미있는 대화 원리에 대한 고찰

관리자
2020-05-29
조회수 318


진정성있고 의미있는 대화 원리에 대한 고찰

                                                                                  박성용


 

며칠 전에 나에게는 매우 흥미있는 일을 경험했다. 그것은 한국의 환경운동의 시작과 함께 한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30주년 기념 토크쇼를 진행했던 경험이었다. 서너 차례 여러 사람으로부터 여러 장소에서 그 때 전체 진행이 얼마나 매끄럽고, 편안하였고, 집중되고 흥미롭게 귀에 쏙쏙 들어왔는지에 대해 칭찬의 말을 듣게 되었다.

 

사실 내가 처음 인터넷 중계를 통한 3시간 토크쇼를 제안 받았을 때는 머쓱하고 내키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데다가 지금은 나아졌지만 그래도 종종 내가 듣는 워크숍의 평가는 내 말이 좀 어렵다 혹은 느리다는 평이 있어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단체를 잘 알고 환경문제에 대해 맥락을 아는 사람이 진행자가 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어서 사람을 찾지 못해 부탁한다는 말에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영 개운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실제 진행하고 나서 기대 못한 칭찬의 말을 듣고서 내가 궁금해지는 것은 칭찬보다는 어떤 원리가 뒤에 숨어 있어서 그런 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것이었다. 3시간에 걸쳐 3 주제로 나눠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태적 인간상” “마을을 살리는 녹색교회” 그리고 “다매체시대에 있어서 기독교환경운동”에 대해 각각 다른 초대손님들과 더불어 토크쇼 진행을 했던 그 경험 속에서 몇 가지 작동원리에 대해 성찰하면서 명료해지게 잡히는 바가 있어 여기서 진술하고자 한다.

 

이 원리들은 비폭력 대화, 회복적 서클 그리고 최근 6주 동안 실시한 요한 갈퉁의 트렌센드 갈등전환 평화워크숍 등을 통해 녹아진 것들이었고 다시 새롭게 다가온 원리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화가 1:1이든, 아니면 서클로 하는 다수와의 대화이든 갈등중재의 상황이든 상관없이 진정한 대화로서 그리고 의미있는 대화로서 갖추어져야 하는 요소들이라는 명료한 이해가 자리잡게 되었다.

 

원리 1. 안전한 공간과 환대의 분위기 조성하기

 

초대 손님들과 1시간 반전에 만나 식사를 하면서 간단히 상견례를 했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 어떠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돌아가며 나누었다. 모두가 토크쇼는 처음이고 멀리서 여러 시간을 들려 상경한 참여자도 있고, 토크쇼에서 뭘 말해야 할지 자신없어하고 부담스러운 분위기였다. 한편으로는 무엇을 묻고 대답해야 할지를 상세히 시나리오도 없어 당황하는 이들에 대해 몇 가지 흐름에 대한 상호 동의와 의견을 나누었다. 내 의도가 무엇이고 이것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대략적인 흐름에 대해 그 어떤 제안이 있는 지를 확인하였다.

 

참여자들의 불안과 당황스러움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행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자신 그리고 모두가 무엇을 위해 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용기를 준 셈이 되었다. 그리고 동의과정을 통해 두려움, 막연한 불안, 내용의 불확실성에 대해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모호함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흐름에 대한 상호공유를 통해 연결의 끈이 생기면서 해보자 하는 신뢰감이 생기고 환대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개인문제로서의 내담자이든, 갈등 당사자를 만나든, 대화에 그 어떤 사람을 만나던지 간에 환대하고 안전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터전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려움, 불안의 감정을 주목하고 이름을 붙여주며 드러내게 하는 것은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한 방식이다. 그리고 무엇을 하길 원하는 지 어떤 대략적인 흐름으로 진행될 것인지 상대방과 확인하고 이에 대해 존중받고 있으며 좋은 아이디어에 대한 수용을 해 주는 것은 진행자와 상대방(참가자, 내담자, 당사자)으로 하여금 직면한 문제에 에너지를 쏟기 보다는 바라는 방향에 신경을 쏟게 한다.

 

 

원리 2, 만남과 초대의 목적, 의도를 의식하기

 

내가 이 대화에 참석한 이유, 동기에 대한 분명한 의식은 직면하고 있는 준비안됨, 불편함, 모호함 등에 대한 지적이고 감정적인 측면들의 장애물을 넘어 우리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에너지와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여기에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로는 대화에 있어 나의 중심세우기이다. 진행자로서 혹은 중재자로서 아니면 대화의 파트너로서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 있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 언어 행위 뒤에 나의 중심 의도는 무엇인가? 생명의 고통에 대한 주목, 약한 자에 대한 존중, 기여, 공공성, 변화, 연대가 나의 중심의도였다. 나는 상대방의 말에 응답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중심 의도를 잃지 않고 그것들이 실현되는 방식으로 말 걸기를 한다.

 

둘째는 상대방의 말을 듣기에 있어 상대방(대화의 상대자, 갈등 당사자, 도덕적 가해자/피해자, 적대자)이 무엇을 말하던지 간에 내가 그 진술에 찬성하든 안하든 내 마음에서 판단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 뒤의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 내적인 중심 에너지의 흐름을 읽고 핵심이 되는 진실의 경험을 짧게 확인해 준다. 이것은 상대방의 논증과 설명을 설명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주로 말하게 되는 사람, 관계, 상황의 표현들 뒤에 있는 의도/가치의 핵심을 노출하고 여기에 연결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그 진술을 상대방으로부터 확인한다.

 

셋째는 ‘나’와 ‘너’ 사이만이 아니라 관련된 숨은 당사자들(이를테면, 관객, 대화에서 언급된 영향받는 타자들)을 포함한 ‘우리’를 세 주체로 놓고 대화진행자나 갈등조정자로서 나는 나-너-우리의 세 중심축에서 각각의 목적과 의도를 의식한다. 즉, 이들을 하나의 전체성(wholeness)의 관점에서 나-너-우리를 보고 각각의 목적과 의도를 의식하면서(각각의 목적이나 의도가 명료하지 않아도 의식을 그런 상황에 개방하여 있기가 중요하다) 대화의 흐름에 참여한다. 이 세 주체에게 중요하다고 직감되어지는 것을 대화의 흐름 속에서 공명하며 명료화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대화의 흐름은 내 지식과 해결 혹은 관점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대화진행자로서 나는 내 중심의도와 가치에 공명하는 것, 상대방의 진심, 가치, 의도를 내가 발견하고 나에게 울린 것에 공명하는 것 그리고 나와 너를 넘어 주변에 있는 청자 혹은 보이지 않은 청자나 더 큰 존재의 그물망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에 함께 공명하며 대화에 현존해 있는 것이다. 초점은 단순한 논의 혹은 정보교환이 아니다. 나-너-우리에게 공통된 관심사, 중요한 것을 의식하며 이에 응답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원리 3, 대답보다 열린 중요한 질문을 하기

 

대게의 사람들은 대화를 요청받을 때나 혹은 중재자로서 갈등 당사자들을 만날 때, 대화의 주제나 갈등 상황에 대해 뭔가 대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적어도 그 영역에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상대방에 대해 응답한다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갖고 있어서 나에게 그런 준비가 없을 때 당황하고 미안해하며 자신없어 한다.

 

대화 진행자나 갈등 중재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해지는 이슈나 화재(topic) 혹은 문제의 명료한 이해보다는 상대방(내담자, 갈등당사자들, 토론자, 논쟁자)에게 중요한 ‘열린’ 질문(예, 아니오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도출해 내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열린 중요한 질문은 주목하게 하고, 에너지를 발생시키며, 지각과 창조성을 갖고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출현시킨다.

 

예를 들어, 생태운동에 관하여 토크쇼를 진행할 때, “기존 교회나 기존 신앙에 대해 실망하신 적이 있나요?”(아니오, 예로 대답가능) 혹은 “그런 삶을 살 때 뭐가 문제였나요?” (문제에 에너지를 쏟는 과거 지향적 질문)이 아니라 가능성을 열고 더 깊은 탐구로 초대하는 열린 질문을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나요? 무엇이 중요하게 다가왔나요?” “어떤 새로운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본인에게 의미있는 삶의 경험으로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가요?”

 

다시 말해 “기존의 교회, 기존의 신앙방식에 무엇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열린 질문처럼 보이나 실제로 에너지를 봉쇄된 갈등 국면에 쏟게 하기 때문에 중요한 질문은 아니다. 가능성보다 비난과 비판의 에너지를 증폭할 여지가 더 많다. “(생태적 삶으로 자신의 신앙, 목회 방향을 바꾸었을 때) 그런 태도, 그런 인식, 그런 삶의 선택이 어째서 당신에겐 중요하게 다가왔나요? 무슨 새로운 만남의 경험을 하셨는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상대방이 에피소드를 말하면 그 이야기 속에서 공명된 중심 의도, 가치, 의미의 핵심에 연결하는 반영을 해 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이것이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이혼을 준비하는 한 여자에게 혹은 동료와의 관계에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고통을 깊이 느끼면서 이렇게 묻지는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이렇게 묻는 순간 과거에로 그리고 수많은 잘못과 옳고 그름의 논쟁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순식간에 미로속으로 상대방을 밀어 넣게 되고 나 자신도 그 미로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줄이거나 아니면 나는 그 상황위의 높은 하늘에서 판단자, 관찰자로 서서 무엇이 옳은 지를 대답이나 제안을 상대에게 강요하게 된다. 열린 중요한 질문은 다른 형태를 취한다: “무엇이 본인이 원하는 바람직한 결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정이라는 것, 동료와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이길 바라세요?” 이것이 이미 문제의 올무 속에 갇혀 있는 상대방을 미래에로의 선택이라는 가능성과 창조성으로 옮아가게 한다. 그것이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가능성을 향해 더 깊은 탐구로 가게 만든다.

 

이 열린 중요한 질문에 대해 상대방이 진지하게 응답하게 될 때, 여기서 행동가능한 지식이 발생하게 된다. 지식이 먼저 있고 그 지식이 행동을 발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해답을 가져야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모호함, 궁지 속에서 열린 중요한 질문은 문제상황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는 창조성을 통해 그 과정 속에서 ‘행동가능한 지식 actionable knowledge’를 출현시킨다. 지식과 행동은 동시 발생적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아하! 그렇구나”하는 뚫림의 경험, 새로운 지평의 경험을 얻게 된다. 열린 중요한 질문은 논쟁이나 문제의 관점을 뚫고 들어가 그 기저에 놓여있는 문제의 본질을 –가치, 희망, 이상에 관여하는 것들- 혹은 사물의 핵심을 보게 하고, 에너지와 미래를 형성하는 선택에 도움을 주는 통찰을 주며, 모호함과 갈등의 폭풍우속에서 삶의 여행을 격려하여 능력을 부여한다. 진행자 혹은 중재자는 해답이 없이도 대화손님이나 갈등 당사자들로 하여금 이 열린 중요한 질문을 통해 스스로의 탐구를 돕고 새로운 가능성이 출현하도록 ‘돕지 않고도 도울(doing by non-doing)’ 수 있다.

 

대화 진행자나 갈등 중재자에게서 열린 중요한 질문을 발견하는 데 있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도움이 된다:

 

- “실제 삶 혹은 그것을 탐구하는 사람들의 실제 작업에 그 질문은 상관이 있는가, 이것은 진정한 질문인가?”

- “나의 이 질문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작업을 하길 원하는가? 즉, 나는 이 질문이 어떤 종류의 대화, 의미, 느낌을 그 질문을 탐구하는 이들에게서 일어날 것인지 상상하는가?”

“이 질문은 희망, 상상력, 참여, 새로운 사고 그리고 창조적 행동을 쉽사리 생산하는가 아니

면 과거 문제와 장애에 초점 두기를 쉽게 증진하는가?”

 

 

원리 4 ‘공동의 지성 collective intelligence’가 작동되도록 하기

 

대화의 공간에 그 누가 참여하든 간에, 이를테면 토크쇼에서는 진행자, 초대손님, 관객,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터넷 청자들 혹은 갈등상황의 중재에 있어서는 갈등조정자, 갈등 당사자들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 누구이던 간에 중요한 것의 하나는 어떻게 이들의 진실/진리들을 모아서 소통되게 할 것인가이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각각의 부분적 진리들을 모아서 진리의 전체성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전체의 진리가 대화의 공간에서 지도력을 갖고 전체를 이끌어 나가게 허락하는 것이다.

 

대화 서클의 이미지로 보면 각 자는 서클의 가(the margin)에서 자신의 진리를 중심(the center)에 내려놓고, 이 중심에 있는 공동의 진리, 공동지성 (collective wisdom, co-intelligence, 혹은 mutual intelligence로 명명됨)이 서클의 가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대화(dialogue)는 그 원래 의미가 dia (둘, 통해서)와 logus(진리, 말)의 합성어로서 쌍방의 진리를 연결하는 것, 혹은 말로서 깊이에 있는 진리를 노출시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대화는 그것이 토크쇼이든 1대 1의 그 어떤 대화이든 혹은 갈등중재의 대화처럼 다수인들의 참여가 있는 대화 형태이든 간에 핵심은 타자 안에 있는 진리를 긍정하고 이것을 노출하는 행위이다. 대화는 타자를 선물로 보며 상대의 현존과 그/그녀의 진리가 서로를 더욱 풍성케 한다는 확신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참여자의 상호 작용이라는 관계와 연결이 일어날 때 지성 더 정확히 말하면 나-너-우리를 아우르는 ‘공동지성’이 이 연계망을 통해 새롭게 출현한다.

 

이 공동지성의 출현을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토크쇼 진행자로서 나는 나의 진실에 대해 혹은 중심의도와 목적에 대해 의식하면서 자기를 표현한다. 나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의 중심에 있는 바를 주제와 관련하여 짧고 간결하게 꺼내 놓는다. 그리고 초대손님 혹은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액면의 진술 뒤로 들어가 그의 내면의 중심에서 무슨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지를 ‘말하지 않은 실재’를 들으려 노력하고 이를 확인한다:

 

- “그러니까 말씀하신 내용은 000께서는 새라는 자연속의 가장 연약한 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배려하고 돕자는 것을 넘어 오히려 우리 인간이 이들의 연약한 존재를 통해 삶의 지혜, 자본주의에 깊이 연루된 위기에 대한 각성, 삶의 생존에 대한 염려함을 넘어 없어도 삶의 아름다움을 축하하며 사는 새로운 차원의 선물을 얻는 생태적 인간상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 맞나요?”

- “세분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내게 핵심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녹색교회가 단순히 시골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살려내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게 하고,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마을 사람들과 경계없이 더불어 살면서 서로 힘을 주고, 도농간에 연대를 통해 도시 신앙인들에게도 뭔가 삶의 활력과 의미를 준다는 것이지요?”

- “말씀하신 것 중에 중요하게 다가 온 것은 생명이라는 게 가장 궁극의 가치이고, 생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결국은 관심이 ‘나’의 경계를 넘어 마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지구의 타자들의 생명에도 관심을 갖는 인식의 전체성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런 전체성으로 자신을 여는 게 중요하단 말씀으로 이해했는 데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요?”

 

더 나아가 진행자로서 ‘나’와 ‘너’로서 초대손님의 진실만이 아니라 어떻게 객석을 포함한 ‘우리’의 진실을 공유할 것인지를 의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간에 객석을 향해 열린 중요한 질문(open questions that matter)을 한다. 이것은 대게 진행자가 듣고 나서 무슨 질문 있나요, 혹은 코멘트 하실 추가 사항이 있나요 라는 호기심이나 궁금증에 근거한 대답유도의 질문보다 더 깊이 나아가야 한다:

 

- “지금 우리는 00에 대한 주제를 초대손님들과 나눴는데요, 이에 대해 어떤 울림이 있었는지, 먼저 지금의 주제와 연관하여 자신에게 진실로 다가온 중요한 것이 있으시면 함께 나눠주시기를 초대합니다.”

- “지금 우리는 00주제에 대해 두 초대 손님들로부터 중요한 화두를 받았습니다. 그건 다매체가 소통의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서 기독교환경운동의 잠재적 활동가들에 대해 접근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리 온라인 매체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수단이지 실체(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두 쟁점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이 두 입장의 진실에 직면해서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어떤 울림의 목소리가 있다면 함께 나눠주시도록 초대합니다.”

 

주어진 세 주제에 대해 각각의 다른 초대손님과의 이야기는 그 핵심의 진실을 확인하고 이는 다시 객석으로 돌려서 각각의 진실의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지도록 기회를 허락하면서 전체의 진실이 공명되도록 하게 한다. 그렇게 될 때 공동지성은 사람들과 아이디어들을 함께 연결시키면서 상호작용을 통해 예측 못한 방식으로 놀랍게도 더욱 생생하고 활력있게 ‘삶을 풍성하게 하기’라는 차원으로 전체를 움직이게 된다.

나의 의견에서 나의 중심으로 말하기, 상대의 의견에서 상대의 중심에서 듣기 그리고 우리 전체의 중심에서 중요한 것이 흘러 소통되게 하기의 세 축이 일어날 때 공동지성은 이 상호작용의 연결속에서 저절로 출현한다. 사전에 전혀 예측못한, 그리고 대답을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이 공동지성이 출현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 공동지성이 작동하게 ‘효과있게’ 일하게 하는 비결이다. 이 공동지성은 우리가 소유할 수 없지만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개방할 때 새로운 실재로서 출현한다.

 

토크쇼와 같은 대담이든, 동아리나 단체의 모임이나 회의이든 혹은 갈등해결을 위한 회복적 서클이든 간에 각자는 나-너-우리의 개인-관계-전체성의 의식속에서 서로의 진심이 연결되고 상대의 것이 선물이 되는 방식으로 중심에게 중심이 말을 걸고 듣는 행위속에 참여함으로 이것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민감한 사항은 단순히 ‘내 말을 하기’ 혹은 ‘내 목소리 내기’나 ‘네 말 듣기’ 혹은 ‘네 목소리 듣기’라는 개인의 참여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나와 우리의 관계’의 전체성(wholeness)속에서 각자는 이 전체성의 일부로서 자신의 말함이 이 전체성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그 초점이 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사항은 객석에서 응답을 다루는 것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질문을 받는 것이 아니다. 공동지성이 발휘되어 전체가 깊은 자각이나 통찰의 깊이로 들어가는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드러내도록 허락하는 나눔을 통한 ‘지식그물망(net of knowledge)짜기’의 순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 순간을 갖고 나서 질문이 있다면 두 번째에서 기회를 준다. 그러나 대게 청중의 일부는 초대손님이 말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알리려는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말하거나 반대의 우려상황을 설정해서 도전하는 논쟁형의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 “선생님의 말씀을 들자니 철새가 오는 12월 3일을 환영의 날로 교인들이 지키고 있다고 들었는데 새가 예민해서 그들을 위협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전철을 타면 스마트폰으로 대부분 뭔가를 하는 데 이건 지나친 상황이 아닌가요?”

 

질문이 도전적일 때, 논쟁을 위한 말걸음 혹은 대화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허점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으로 응답이 다가올 때, 진행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는 대화자와 질문자가간에 누가 옳고 그른지를 맞붙게 하거나, 상대방이 지금 여기서 그런 질문이 뭔가 잘못되었는 지를 암시를 주는 것이 아니다. 질문자가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을 존중하면서 표면에 주장하는 입장 뒤에 중심의도를 파악하여 그 에너지의 흐름을 공동지성이 작동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 “아하, 그러니까 선생님의 질문은 새의 안전함을 돌보기 위해 그런 환영의식은 어떤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지 그것이 궁금하시다는 거군요. 이에 대해 (초대손님은) 무엇을 제안하실 수 있겠어요?”

“때때로 다매체가 편리와 가능성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려할 만한 관계의 단절과 같은 역기능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다매체 사용의 한계나 제한에 대한 고려점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회의나 모임에서 진행자는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논쟁을 걸어오는 사람을 골치아픈 사람으로 바라보거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 보다는 말하는 이면의 중심 에너지와 의도를 살피고 그것의 진정성을 노출하도록 도움을 주어서 논쟁자의 말을 선물로 받는 기회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원리 5 진행자가 심오한 품성을 갖기보다는 대화의 구조를 안전하게 하기

 

대화의 진행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능숙한 진행기술과 부드럽고 친절한 품덕의 사람이어야 회의나 모임을 주관하는 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것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대화 진행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문제의 해결, 좋은 대화의 결과물 얻기 혹은 갈등 당사자들의 화해를 위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대화진행자의 인품보다 대화의 안전한 구조를 설정하고 이를 지키며 온전히 현존해 있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대화의 안전한 구조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거나 기대 밖의 공동지성의 출현을 통한 궁지 벗어나기 혹은 공유된 목적에 대한 에너지 얻기에 결정적이라는 생각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 논쟁, 두려움이나 수치심, 강제나 교훈주기 등의 대화 방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상대방에 대한 인격의 평가에 초점을 두고 살았기에 대화의 안전한 구조가 어떤 새로운 지평을 여는 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화의 안전한 구조를 설정하는 데는 두 가지 확신이 필요하다:

 

- 과정 자체를 신뢰한다.

- 참여자들을 신뢰한다.

 

과정 자체가 공동의 선을 향해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참여자들안에 선의와 진실이 있으며 기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매우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런 두가지 신뢰를 내면에서만 지니고 있지 않고 이것을 대화의 공간속에 구조화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이 신뢰를 공간화한다는 것은 다음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 첫째, 상대방이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도록 공간을 허락한다. 그리고 이것을 간결하게 핵심을 반영하여 상대방이 자신의 진실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다.

- 둘째, 나의 진실을 드러내는 공간을 허락한다. 상대방의 말에 대응해서 상대가 놓친 못본 부분을 말하는 나의 스마트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초점이 된 주제와 관련하여 나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표현한다.

셋째, 상대방과 나의 진실을 연결하고, ‘우리’의 진실을 연결함으로써 적대적인 대결이 아닌 더 큰 진리에 기여하는 관계로 서로를 발전시킨다. 여기서 신뢰가 싹트게 된다.

  비폭력대화의 원리.show

이것은 쟁점에서 자신의 느낌과 진심을 노출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사자들간의 소통의 관계와 연결을 가능하게 하여 안전한 공간을 마련한다. 이것이 주로 갈등 중재자들이 하는 역할이다.

대화의 안전한 구조는 쟁점과 관계를 확인하고 여기서 에너지를 발화시키지만 더 나아가는 것은 전체적 시야 (다양한 시각들의 노출을 통한 전체성의 출현)를 갖는 것과 함께 삶의 맥락에서 그 상황의 이면에 있는 심층 구조를 확인하고 이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구조화하는 데로 이끌어 질 때 더욱 생산적이게 된다. 예를 들어 토크쇼의 사례경우에는 자본주의의 폭력(쟁점)과 생태적 타자의 지혜를 수용하는 새로운 관계(새와의 새로운 관계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새로 인한 변화, 도농간의 변화, 마을의 활력에 대한 기독교 중심을 넘는 전체적인 시야(다중-관점)을 얻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도농간의 직거래의 중요성과 프로그램을 통해 구조화시키기, 한국내에서 유기농의 생활화만 아니라 지구전체의 생태계와 원격 타자의 아픔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 곧 구조의 변형이 도출되면서 새로운 통찰과 신선한 감동이 다가오게 된다.

 

이렇게 대화진행자는 시간적으로는 상대방의 진실 수용/노출->나의 진실 표현->우리의 진실 경험하기로 진행되는 대화진행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4가지 요소 쟁점->관계->전체적 시야-> 시스템/구조로의 진행의 구조를 의식하면서 대화에 온전히 현존하기로 있을 때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내 것을 말하지 않아도 풍성한 수확을 모두가 경험하는 결과를 맛보게 된다. 모두가 기여하는 안전한 공간을 형성하기 그리고 대화의 범위가 쟁점과 관계를 넘어 전체에 대한 시야과 실행구조를 형성하면서 대화-인식-행위의 통전적인 응답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지금까지 진술을 통해 이번 대화 진행의 경험이 3시간의 긴 상황에서도 각자에게 의미있게 다가오고 집중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한 나의 성찰이다. 그 때는 자세히 몰랐지만 이제야 생각해 보면 위와 같은 원리들이 추론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원리들에 대한 재확인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통찰을 주고 있다.

(2012.10.27.)

 

 

기독교 갈등전환&화해센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11길 20 CI빌딩 501호 기독교 갈등전환&화해센터 대표 : 박성용
문의 : 02)312-1678 (09:00 ~ 17:00, 주말/공휴일 제외) 메일: paxchristi@daum.net 

© paxchristi.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