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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서클] 회복적 서클의 작동원리: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

관리자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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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서클의 작동원리: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

 


대화에 있어서 서클로 진행되는 방식은 그 서클에서 발생하는 존중의 에너지에 따른 참여자 개인과 집단에 단순한 친밀한 관계만이 아니라 정체성에 있어서도 강력한 변혁적 특성을 가져온다. 그런 기여로 인해 학교와 시민사회에서는 2010년대에 들어와서 서서히 내 주변과 네트워크 단체들에서 서클형 모임이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서서히 들어온 서클형 국제모델들의 한국에서의 도입과 그것을 진행하는 진행자들의 실천 커뮤니티의 덕분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서클로 진행되는 국제모델이자 내가 진행자겸 훈련가로 참여하는 서클형 모델은 도입시기로 보면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청소년평화지킴이(HIPP), 신뢰의 서클(파커파머), 회복적 서클(도미니크 바터), 스터디 서클(오스카 올슨) 등이다. 이들 모델은 서클 프로세스라는 일반적인 서클 진행방식과는 달리 자체적인 완결적인 진행 프레임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AVP/HIPP는 활동을 통해 삶에서 일어나는 무력감과 폭력적 대응에 대한 다른 대안으로서 능력부여(임파워먼트)하는 데 초점을 둔다. 신뢰의 서클은 영혼의 내적 성실성과 성실성을 부여하는 또 다른 능력부여의 내적탐구에 초점을 둔다. 스터디 서클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립적인 문제해결과 대안모색을 하는 협력적 이슈탐구와 민주적인 커뮤니티 구축에 초점을 둔다. 회복적 서클은 갈등과 폭력에서 일어나는 “적대적 영향력의 상황(손상)”을 전환시켜 공동체 구축을 돕는다.

 

나열한 서클 모델중에서 회복적 서클은 창시자 도미니크 바터의 말처럼 ‘갈등의 폭풍우속으로 들어가기’라는 매우 전위적인 성격을 갖는다. 말 그대로 혼란과 적대감의 폭풍우속으로 서클이라는 ‘안전한 공간’을 끌고 들어가 무관심, 욕설, 증오의 단절된 관계속에서 대화를 통해 다시 관계를 구축하고,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탐구작업을 통해 가능한 미래를 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모든 서클 진행방식이 참여할 때는 쉽고 자연스럽게 보여도, 실제 진행하는 데 있어서는 부단한 노력과 자기인식이 필요하지만, 특히 회복적 서클의 경우에는 만성적이고 심각한 갈등상황에 있어서는 예측 불가능한 갈등당사자들의 감정폭발과 에너지 흐름의 전환에 있어 진행자의 대단한 주의력이 요구된다. 마치 윈드서핑처럼 파도 타는 절박함과 긴급성이 그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윈드서핑에 큰 어려움 없이 연습을 통해 파도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회복적 서클도 어려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learnable’) 것이어서 실제 상황에서 낭패를 보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만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모델이기도 하다.

 

‘회복적 서클’은 그 문자적인 의미에 있어서 작동방식과 관련하여 다음 두 개념 고리가 중요해진다.

 

-‘서클로 진행하기’: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서클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서클 진행은 그것이 어떤 이슈를 담든지 –예를 들면, 이해, 배움, 기획, 문제해결, 자치운영, 돌봄, 공동체 구축, 비전형성 등- 서클의 기본 틀과 흐름에 대한 이해와 그 진행능력이 필수가 된다. 서클은 놀랍게도 그 이슈가 무엇이든 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나 공동체구성원들이 스스로 존중의 방식으로 서로에 대해 그리고 이슈에 대해 이해해 가면서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데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클 진행에 대해 익숙한 진행자와 참여자들의 경우에는 다루고자 하는 이슈와 사건이 어떠한 성격이든 간에 환대와 연결, 이슈의 명료화, 진정성을 공유하기, 일의 분담과 앞으로 나가기에 있어 자연스러운 진행 흐름속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열정과 지혜를 품어내게 되다.

 

-‘회복시키기’: 이는 ‘회복적 실천(Restorative Practices)’에서 나온 손상, 폭력, 범죄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기존의 처벌 방식과 다른 대안으로서의 실천에 대한 ‘개념적 틀(conceptional frame)’이다. 하워드 제어 등의 실천가들에 의해 소개되는 이 대응 방식은 기존에 일어난 손상과 범죄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지닌 강제적 고통부여의 방식이 아닌 당사자들의 관계와 책임이행을 공동체가 존중하는 방식인 새로운 개념인 것이다. 이 방식은 단순히 국가 등 제 3자의 응보적 처벌권에 대한 기존의 방식과 달리 당사자들의 해결방식을 존중하는 방식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두 가지의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는 데 하나는 정의세우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고 –치유와 관계로서 정의- 다른 하나는 국가와 법 뒤에서 작동하는 외적인 권력과 지배체제로부터 당사자들과 공동체에 힘을 부여하는 실질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의 가능성을 열게 된다는 점이다.

 

‘회복적 서클’은 위의 진술처럼 서클로 진행하기라는 과정의 진행과 회복시키기라는 가치인식론적 개념이 합해져서 손상과 범죄에 대해 존중과 공공성의 가치를 작동시켜 함께하는 힘으로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내고 공공의 안녕/복지(wellbeing)로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정의와 복지의 문제를 힘과 권위에 의존하기 보다는 이해, 신뢰, 태도의 변화, 달라진 인간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성과물로 본다는 점에서 소시오크라시(socio-cracy)의 가능성을 여는 모델이라 볼 수 있다.

 

도미니크  바터는 회복적 서클의 이해에 있어서 훈련에서 사용하는 매뉴얼 자체보다는 광의의 보편적 개념인 ‘공동체의 자기 돌봄 프로세스’라는 말을 회복적 서클에 대한 정의에 있어 핵심으로 설명하였다. 즉, 회복적 서클은 사전에 이 모델을 사용하는 공동체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손상, 파괴 그리고 범죄에 대해 스스로를 돌보는 과정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일어날 때 누구나 공동체 구성원중 이를 진행하는 사람을 지명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공동체를 복원하도록 자발적인 분위기를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것에 대해 한국에 왔을 때 긴 시간을 들여 역설하였다.

 

필자가 2011년 12월에 소개받고 지난 5년간 회복적 서클 실천가로서 활동하면서 그의 회복적 서클에 대한 정의인 이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라는 말은 단순하지만 명쾌하고도 심오한 진술임을 거듭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세 단어야말로 회복적 서클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이해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경험으로 이 세 단어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 작동원리를 보여준다.

 

1) 관계적 갈등의 차원에서


회복적 서클의 진행이 관여하는 사건이 1:1의 개인 간의 손상과 폭력의 사건이든 아니면 집단 간의 사건이든 간에 유효하게 작동되는 방식은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에 따른 일련의 구조화된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 공동체: 손상을 일으키거나 그것에 피해를 본 사람은 단순히 갈등 당사자들만이 –흔히 말하는 가해자나 피해자들- 아니다. 손상은 그 당사자들 개인만이 아니라 그들이 소속한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일반적인 갈등이해에 있어서 당사자들은 직접 관여된 개인들만 아니라 그들이 소속한 공동체도 당사자들로 이해된다. 즉 책임의 주체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집단적 책임도 주어지는 것이다.

 

공동체가 의미하는 또 다른 측면은 문제해결의 자원에 대한 것이다. 이는 외적인 권위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노력이라는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생한 문제나 이슈를 스스로 자신의 내부의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는 지혜의 터전이자 해결하려는 에너지의 발원지가 된다.

 

- 자기 돌봄: 일어난 손상과 범죄는 제거되어야 할 문제(a problem)로 보기 보다는 개인과 공동체가 그동안 무엇을 놓쳤는지를 살피는 성장과 배움의 기회이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것을 간과했는지 살펴보고, 어긋난 목적(아들러)이나 놓친 필요와 욕구(로젠버그)를 충족시키는 자기 돌봄의 기회로 그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갈등과 폭력에 관여한 당사자들은 문제아나 골치 아픈 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자각하게 하고 그것을 보완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문제아이기 보다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에 덧붙여, 돌봄은 정의 실현에 있어서 ‘원칙’의 준수와는 매우 다른 감각을 제시한다. 불의와 불공평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골라내거나 벌주는 방식으로서 원칙보다는, 그 일어난 불의와 불공평으로 인해 실현하지 못한 가치/목적/욕구/의도에 대한 자각과 돌봄(care)의 실천에로 당사자들과 공동체구성원들을 부른다. 

        

프로세스: 불의와 불공평한 사건은 언제나 상대방에 대한 고정-언어로 다가가게 되어 상대방의 인간성이 지닌 풍성함을 특정행위의 이미지로 축소시키게 된다. 이런 고정화된 프레임을 풀어내는 과정-언어를 통해 갈등 당사자들과 영향을 받은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일련의 구조화된 대화 과정을 통해 서로의 인간성을 재확인하고 놓친 의미/목적/욕구를 실현해 나가는 자발적 동의에 도달하게 된다.

프로세스는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련의 절차를 만들어낸다는 단순한 의미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대답을 알지 못하는 모순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상호적대의 당사자들이 구조화된 프로세스를 통해 어둠의 대화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해의 빛을 얻게 되는 지성의 출현을 가져오는 방식이기도 하다. 서로의 진실들의 실타래들이 풀리고 서로 얽히면서 새로운 의미의 출현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것을 ‘공동 지성’의 출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공동 지성의 출현은 프로세스를 통해 마음이 열리고, 연결되어질 때 발생하게 된다.



2) 회복적 서클 진행자의 가슴의 차원에서

회복적 서클 진행자는 ‘대답’을 알거나 방향을 잡고 갈등사건에 임하지 않는다. 진행자가 지니고 있는 것은 신실한 봉사에 대한 자기 인식이며, 그가 익숙하게 배운 구조화된 열린 질문과 경청의 방식을 당사자들에게 적용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혼란과 불확실성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에너지를 얻는 것인가? 이에 대한 통찰도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속에 감추어져 있다.

공동체: 서클 진행자는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지혜를 참여하기로 동의한 사람들 속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이미 충분하고 자족하며, 서클에 모인 자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충분한 자원(resources)이 된다. 특정한 전문가의 개입과 조언이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로 동의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혜와 노력은 진행자가 가장 중요시하는 지혜의 원천이다. 그런 점에서 서클 진행자는 ‘참여자들을 신뢰’한다는 중요한 작동 원리를 배운다. 서클 진행자는 자신의 지식에서가 아니라 참여자에 의존함으로써 파괴된 의미구조와 관계를 구축하는 토대를 형성한다.

서클 진행자가 자신의 지혜가 아닌 ‘공동체’에 의존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모든 상황이 공동체이고, 언제나 선의를 지닌 서클 진행자를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경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신뢰하는 것이다. 강물의 역류와 소용돌이는 전체 흐름의 일시적인 고정화일 뿐 전체성의 흐름은 그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만나는 적대적 갈등 상황이라는 역류와 소용돌이는 그 전체성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전체성은 언제나 작동하며 흐르고 있다. 역류와 소용돌이는 그 전체성에 참여하고 있고 그 전체성이 그 역류와 소용돌이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세계의 근본 구조는 공동체적임을 진행자에게 자각하게 만든다.

자기 돌봄: 손상과 아픔은 단순히 돌봄을 위한 것만 아니다. 여기에는 더 심오한 의미가 존재한다. 즉, 서클 진행자가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 공동체 구성원의 갈등사건이나 어느 낯선 자나 단체의 요청에 의해 자기 시간과 열정을 내어 주는 것은 서클 진행자의 자기-돌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갈등의 폭풍우속에 다가가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내 것의 내어줌은 언제나 상대방이 소유하고 내 것의 손실로 이해된다. 그러나 관계와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나의 내어줌(giving)은 희생과 손실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돌봄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관계와 내면에서 내어줌은 언제나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 지를 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 지는 내가 주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이는 내가 주는 것을 통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며, 주면 줄수록 내가 얼마만큼 더 소유하고 있는지를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는 만큼 더욱 내가 풍성하며 상대방의 아픔과 상처의 치유를 통해 나의 온전성이 더욱 강화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나는 재취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 돌봄의 비결이 되는 것이고, 여기서 에너지의 소진이 아닌 에너지의 분출과 갱신 그리고 정신적 자각이 일어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자기 돌봄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헌신이 강화되고, 그러한 헌신으로 변화되는 자기 정체성을 경험한다.

프로세스: 서클 진행자는 서클 진행의 과정을 통해 삶의 과정이 어떠한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그것은 손상과 심리적 도전이 보다 온전한 삶에 대한 통찰과 자기 성장의 ‘창문(window)’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여행자가 길을 가면서 만나게 되는 물체들을 장애물로 여기기보다는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체크포인트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 길을 감에는 동영상처럼 일련의 스냅사진들이 연결되어 있고, 특이한 한 스냅사진(즉, 손상과 갈등의 사건)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전환의 국면을 만들어내며, 전체속에서는 과정의 극히 일부인 것이다.

보다 나은 웰빙, 풍요로운 삶으로의 길은 과정의 펼쳐짐을 통해 온다. 여기에는 서클이 지닌 프로세스가 도움이 된다. ‘인식-환대-연결-탐구-나아감’이라는 과정의 흐름을 타면서 나는 안내받는다. 이러한 ‘안내받음(being led by)’의 프로세스가 영혼에서 일어날 때 그는 별다른 삶의 저항과 방해로 인한 에너지의 소진을 받지 않는다. 에너지의 소진이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신비로운 경험이 일어난다. 비유하자면 흐르는 물에 물레방아(서클의 원리)를 고정시켜 놓으면 그 흐르는 물이 낙차하면서 빛과 전류를 방사하는 것처럼 프로세스는 다른 변형의 연금술을 창조해 낸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것에 대해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존중어린 환대와 연결’이다.
 


마무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만나는 고통의 핵심에는 두려움과 위협이 삶의 원리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이 분출되는 갈등상황과 사건들이 안 풀리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두려움의 작동원리를 그대로 인식체계로 수용하여 적용하는 데 있다. 그래서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라는 작동원리와는 역방향의 상황을 도출해 낸다. 즉, 공동체가 아닌 파편화와 분열로, 자기 돌봄이 아닌 비난과 보복, 그리고 프로세스가 아닌 고정된 신념/이미지의 주장으로 인해 ‘생명을 주고 풍성케 하는’ 방식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으로 우리가 드라이브 하다가 장벽을 만나 부서지거나 낭떠러지를 만나 추락하는 것은 바로 두려움과 옳고 그름이 만드는 ‘송곳 눈’으로 인해 풍성한 실재를 축소시켜 단면화시키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자기 돌봄 프로세스’는 불교의 화엄적인 상생의 연기론이든 기독교의 샬롬과 은총의 성령에 대한 개념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무사일여(無私一如)의 전체성이라는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다. 이는 전체성을 열고 우리를 풍성함과 자비로움의 세계로 인도한다. 거기서 우리는 쉼과 회복을 얻게 된다.

기독교 갈등전환&화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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